배우 외길로 70년 한국영화 역사 썼다… ‘국민배우’ 안성기 별세

2017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주최한 안성기 데뷔 60주년 특별전 개막식에 참석한 배우 안성기가 웃으며 소감을 밝히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한국영화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국민배우’ 안성기가 별세했다. 향년 74세.
5일 소속사 아티스트컴퍼니에 따르면 안성기는 이날 오전 9시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받던 중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의식불명 상태로 입원한 지 엿새 만이다. 그는 지난 달 30일 자택에서 음식물이 목에 걸린 채 쓰러져 심폐소생술을 받은 후 병원으로 이송됐다.
소속사는 “고인은 배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의 품격과 책임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며 선후배 예술인들과 현장을 존중해 온 진정한 의미의 ‘국민배우’였다”며 “아티스트컴퍼니는 갑작스러운 비보에 깊은 슬픔을 느끼며,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분들께 진심 어린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고 전했다.
고인은 혈액암으로 지난 수년간 투병해왔다. 지난 2022년 배창호 감독의 40주년 기념 특별전 개막식에서 탈모로 인해 가발을 쓰고 어눌한 말투와 불편한 걸음걸이로 병세를 드러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호전된 모습을 보였으나 “연기자로 복귀하겠다”는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아역만 70여 편, 해외연기상 탄 첫 한국배우

안성기는 다섯 살 때부터 평생을 영화배우로 살았다. 8세 때인 1960년 김기영 감독의 명작 ‘하녀’에서 주인공 김동식(김진규)의 아들 창순을 연기하고 있는 안성기. 그의 데뷔작 ‘황혼열차'(1957)도 김기영 감독 작품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장호 감독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에서 배우 임예진과 연기하고 있는 안성기. 9년간 배우 경력 공백기를 갖고 20대 중반에 복귀한 안성기는 이 작품에서 시골에서 상경한 청년 노동자 덕배를 열연하며 대종상 남자신인상을 받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아역 배우로 연기를 시작한 안성기는 60여 년간 18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1952년 1월 1일 대구에서 태어나 5세 때인 1957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했다. 부친이자 배우 겸 영화제작자로 활동했던 고 안화영 선생이 김 감독과 친분이 있어 부자가 동반 출연하게 된 작품이다. 1959년 영화 ‘10대의 반항’으로 제4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서 아역상을 수상하며 한국 영화 최초로 해외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배우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1960년대 한국영화 대표작으로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하녀’(1960)에도 출연했다. 아역 시절 출연한 작품만 70편이 넘지만 상당수가 소실된 상태다.
학업에 전념하며 9년의 공백을 보낸 그는 대학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하고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뒤 1977년 ‘병사와 아가씨들’로 스크린에 복귀했다. 성인 배우로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첫 작품은 ‘바람불어 좋은 날’(1980)이었다. 고도성장기 서울 변두리를 배경으로 시골에서 상경한 젊은 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린 리얼리즘 계열의 이 작품에서 안성기는 순박한 청년 덕배를 연기해 대종상 남자신인상을 수상했다.
안성기 출연작이 바로 유신 이후 한국영화사

안성기는 1980년대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 중 하나인 ‘고래사냥'(감독 배창호·1984)에서 정체불명의 떠돌이 ‘민우’를 연기했다. 민우, 병태(김수철·왼쪽), 춘자(이미숙)의 3인 로드무비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으로 안성기는 당대 최고 흥행 배우로 자리매김한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한국 코미디 영화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히는 ‘투캅스(감독 강우석·1993)에서 ‘평생의 콤비’ 박중훈(왼쪽)과 연기하고 있는 안성기. 열혈 신참 형사 박중훈을 타락시키는 능구렁이 부패 형사로 변신해 연기 폭을 넓히고 대중적 친근감을 더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안성기의 영화 인생은 유신정권 이후 한국영화의 역사와 다름 없다. 그를 제외하곤 1980~1990년대 한국영화를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다. 1980년대 초에는 ‘어둠의 자식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만다라’(1981), ‘꼬방동네 사람들’(1982) 등 사회와 종교를 다룬 묵직한 작품들에서 임권택 이장호 배창호 등 당대를 대표하는 감독들과 함께했다.
이후 그의 이름은 ‘흥행 보증 수표’가 됐다.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겨울 나그네’(1986), ‘이장호의 외인구단’(1996),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남부군’(1990), ‘투캅스’(1993),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등 흥행작 리스트는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한국영화 최초의 1,000만 관객 영화인 ‘실미도’(2003)를 비롯해 2023년 ‘노량: 죽음의 바다’에 특별 출연하기까지 고인은 거의 매년 쉼 없이 관객과 만났다.
대통령에서 거지까지, 천의 얼굴 ‘국민배우’

2003년 5월 영화 ‘실미도'(감독 강우석)에 캐스팅된 안성기가 인천 실미도 촬영현장에서 허준호 설경구 등 다른 배우들과 영화 성공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고 있다. 현대사 비극인 ‘684부대’ 사건을 모티프로 그해 12월 개봉한 이 작품은 한국영화 최초로 1,000만 명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신기원을 썼다. 한국스포츠경제 김용근 기자

2012년 1월 영화 ‘부러진 화살’ 개봉을 앞두고 정지영(오른쪽) 감독과 함께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는 안성기. 안성기가 ‘남부군'(1990), ‘하얀 전쟁'(1992)에 이어 세 번째로 출연한 정 감독 작품으로, 당초 1억 원짜리 저예산 영화로 기획됐던 이 작품은 그의 합류로 제작비 확보에 숨통이 텄다. 류효진 기자
안성기만큼 ‘국민배우’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배우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곧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작품 속에서 안성기는 조선의 왕이자 천민이었고, 경찰이었다가 냉혹한 살인범이 되기도 했으며, 대통령이자 떠돌이 거지,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신라시대 스님에서 천주교 신부로 변신하기도 했다. 베트남전 참전 군인, 연예인 매니저, 소방서장, 삼류 개그맨, 헤어드레서 등 극 중 연기한 직업군도 다양했다.
오래도록 연기 활동을 이어가며 상도 많이 받았다. 특히 1980년대 초에는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을 4년 연속(1982~1985) 수상하고,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1982, 1983, 1985년 세 차례 받는 등 4년간 총 7회 남우주연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로 처음 만난 박중훈과는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며 영화계 대표 콤비로 유명했다.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라디오 스타’까지 콤비의 합작품은 늘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박중훈은 “안성기라는 배우는 사람으로서 훌륭한 품성을 가진 인격자”라며 “제가 배우가 돼서 안성기 선배와 여러 영화를 찍은 것도 큰 행운이지만 그렇게 훌륭한 분과 같이 있으면서 좋은 영향을 받은 게 저한테 가장 큰 행운”이라고 존경을 드러냈다.
“연기만 생각한 인격자” 관객 신뢰 평생 지켜

2019년 개봉한 영화 ‘사자'(감독 김주환)에 출연한 안성기가 그해 6월 열린 제작보고회에서 배우 박서준을 바라보며 발언하고 있다. 미스터리 액션물인 이 작품에서 바티칸에서 파견된 구마 사제를 연기한 안성기는 라틴어 대사를 소화하는 등 변함없는 열정을 보여줬다. 한국스포츠경제 임민환 기자

2023년 5월 17일 서울 성동구 메가박스 성수점에서 열린 배우 강수연 1주기 추모식에서 안성기가 배우 박중훈과 개막 인사말을 하고 있다. 혈액암 투병 중에도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은 안성기는 이날 쉰 목소리로 “우리 수연씨가 이 자리에는 없지만 어디서든지 지금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제공
성실하고 정직하며 청렴한 이미지 덕에 정치권의 러브콜도 많이 받았지만 연기자로 외길을 걸었다.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에는 무관심했지만 한국영화계의 중요한 현안 해결이나 영화 산업 발전 등에는 앞장섰다.
2000년부터 스크린 쿼터 수호천사단 단장을 맡고, 2006년 스크린쿼터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영화불법복제방지 캠페인 ‘굿다운로더’ 홍보대사 등으로 활동했다.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을 맡았고,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2003~2021) , 신영균예술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 대중문화예술 발전에 기여를 인정받아 2013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니세프 친선대사로서 30년 넘게 봉사한 공로로 2023년 4‧19 민주평화상을 수상했다.
안성기는 2019년 혈액암 진단을 받고 이듬해 완치 판정을 받았으나 6개월 만에 재발했다. 암투병 중에도 현장에 복귀해 영화 ‘카시오페아’ ‘한산: 용의 출현’ ‘탄생’ ‘노량: 죽음의 바다’ 등에 출연하며 연기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2022년 대종상 공로상을 받은 뒤 영상을 통해 “제 건강 너무 걱정 많이 해주시는데 아주 좋아지고 있고, 또 새로운 영화로 여러분들을 뵙도록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으나 2023년 강수연 추모전 개막식, 4·19 민주평화상 시상식 등에 참석한 뒤 다시 건강이 악화하며 공개석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치료에 전념해 왔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고인은 배우로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최고의 국민배우”라며 “대중과 시대를 함께 했으며 연기 외에 다른 분야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늘 신뢰를 지키려 했던 배우”라고 말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31호실에 마련됐다. 유족으로는 아내 오소영씨와 아들 다빈·필립 씨가 있다. 장례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과 한국영화배우협회 주관으로 영화인장으로 진행된다. 명예장례위원장 신영균, 배창호 감독, 한국영화배우협회 이갑성 이사장,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직무대행 신언식, 한국영화인협회 양윤호 이사장 등 4인이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았다. 후배 배우이자 소속사 대표인 이정재 정우성이 운구를 맡아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할 예정이다.
발인은 9일 오전 6시, 장지는 양평 별그리다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