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의는 어디에 있는가
아름다운 진주 남강과 진주성을 배경으로 한 화려한 빛의 축제가 가을밤을 수놓는다. 10월8일부터 22일까지 진주 남강에 등을 띄우는 유등(油燈) 축제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에서 유래했다. 진주 목사 김시민 장군을 비롯한 3,800명의 군사들이 7~8배나 많은 2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쳤다. 칠흑 같은 밤 왜군의 남강 도하를 저지하고 성 밖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하려고 성 아래 남강에 등을 띄운 것이다.
당시 왜군은 침략한 지 불과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선조 임금은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했다. 조선을 지킨 것은 이순신 장군과 의병들이었다. 특히 곽재우·윤탁·최강 등 경남 일원에 수많은 의병들이 일어났다. 그 배경에 경(敬)과 의(義)를 바탕으로 실천을 강조한 대쪽 같은 재야 학자 남명 조식이 있었다. 그의 사후 20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고 그의 제자들이 나라를 구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오늘날 그 일대 출신들이 삼성·LG·GS·효성 등 많은 대기업을 일으켜 세운 데에도 남명의 영향이 적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남명 사상을 한국형 기업가 정신의 원류로 본다. 남명이 선조에 올린 ‘단성현감 사직 상소’에는 그의 시국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늘의 뜻은 이미 가버렸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마치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벌레가 속을 파먹고 진액도 다 말라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까지 이른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조선의 정치가 정쟁과 사화로 민생을 외면해 나라가 거덜 날 상황에 다다랐음을 지적한 것이다.
남명이 이 시대에 살고 있다면 어떤 울림을 줄까. 우리는 남북통일을 이루기도 전에 인구절벽과 저성장의 초입에 직면해있다. ‘잃어버린 30년’의 일본, ‘재정위기’의 상당수 유럽 국가들의 고통이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포퓰리즘의 망령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국가 부도로 허우적댄 그리스, 수백 퍼센트의 인플레이션 늪에 빠진 아르헨티나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여야 정치권이 민생을 뒷전으로 한 채 이념·권력 투쟁에 매몰되다보니 수명은 늘어났는데 국민연금을 개혁하지 않아 보험료율이 25년째 9%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18.3%의 절반을 밑돈다. 이대로 가면 기금 고갈로 소수의 미래 세대가 수많은 노인들의 연금을 부담해야 한다니 아찔하다. 2023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국가 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이 64개 국 중 28위였지만 노동시장 부문에서는 39위에 불과했다. 글로벌 기술 패권 전쟁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정부와 정치권이 더 늦기 전에 노동·연금·교육·공공 부문 개혁에 나서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집단 이기주의에 발목이 잡혀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가 정보기술(IT) 부문에서 선두권으로 질주하고 있지만 비대면 진료는 OECD 회원국 가운데 유일하게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기존 의약업계의 반발 때문이다. 온라인 법률 서비스도 대한변호사협회의 제동으로 10년 가까이 절름발이 상태다. 공유경제 기반의 모빌리티 혁신 기업 ‘타다’는 소비자들이 몰리면서 급성장했지만 택시 업계, 정치권, 검찰이 씌운 ‘불법’이라는 족쇄에 갇혀 좌절했다.
우리나라는 기술력에 있어서 중국·인도 등 후발 국가들로부터 거센 추격을 받고 있다. 이미 중국의 기술 수준이 높아지면서 대중 무역적자가 8월까지 11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30년간 이어진 대중 무역흑자 시대가 막을 내릴 위기에 직면했다.
이런데도 정치권은 정신을 못 차리고 민생과 개혁을 외면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집단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진입 장벽을 쌓으며 혁신을 거부하고 있다. 자칫 공멸의 길로 접어들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 이 시대의 의로움은 어디에 있는가. 끊임없이 위기의식을 갖고 후진을 양성해온 남명 선생의 삶을 돌아보며 진정한 시대정신을 가다듬어야 할 때다.
<로스앤젤레스 오현환 서울경제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