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필라델피아 > Column > 강승호   칼럼  “ 평화적 통일을 위해 몸 바친 풍운아”

강승호   칼럼  “ 평화적 통일을 위해 몸 바친 풍운아”

 오늘날 처럼 조국이 애국 애족의 불타는 인물이 요구되는 때다. 그토록 국내외에서 태극기와 촛불 집회로 동포끼리 반목하고 얻어진 결과는 무엇인가?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여 전세계가 자재 할 것을 촉구하는데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 병자처럼 전쟁몰이에 광분하는 오늘날, 70평생 조국 독립과 통일의 선봉장으로 투쟁하다 같은 민족에게 저격당한 비운의 독립 운동가 “김구”(1876-1949) 선생을 소개한다. 

 그는 황해도 해주서 80리떨어진 백운당 텃골서 김순영과 곽낙열의 아들로 태어나 15세때 한학 공부를 한 후 1893년동학에 입교, 1894년동학 혁명 때 19세에 반민중 구국 운동에 참여, 1895년일본군에 쫓겨 만주로 건너가 의병단에 가입, 이듬 해 귀국, 명성황후(1851-1895)의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육군 중위 쓰지다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 되었으나 고종(1852-1919)의특사로 감형, 복역하다가 1898년(광무2) 감옥에서 탈출, 그해 마곡사로 피신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 해 환속 후 1903년 28세때 기독교에 입교하고 농촌 계몽을 하던 중 1910년이도영, 이희영 독립 투사들과 기독교로 개종, 1911년 36세때 105인 사건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되어 1914년 출옥, 3,1 운동을 하다가 1919년 44세때 본격적인 독립 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임시 정부 경무국장, 내무 국장, 국무령을 지내면서 이시영(1869-1953)등과 한국 독립당을 조직, 당수가 되어 광복군을 진두 지휘, 삭막한 만주 벌판을 무대로 독립군을 이끌며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천노숙하며 춘하추동 구국의 의지를 불태우며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932년사쿠다 저격사건,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일본왕 생일식장 폭탄 투하 사건, 이봉창(1900-1932), 윤봉길(1908-1932)등의 의거를 지휘하기도 했다. 

 1945년 70세의 꿈에도 소망하던 해방을 맞아 귀국, 미,영, 소련이 우리나라를 신탁통치(다른 나라가 대신 통치함)하기를 결의하자 반대하고 김구는 통일 정부를 수립의 염원을 안고 남북 형상을 제안, 1948년 73세나이로 평양에 가서 북측과 회담을 열었으나 그의 무혈 평화통일의 염원은 실패했다. 

 그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면서 이승만과 대립하여 중간파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애석하게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공산주의 사상은 애인도, 부모도, 재산도, 조직도, 자신도 내버리고 유물론, 무신론, 사상으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하는 그들의 실체는 비극으로 점철되고 있지 않은가? 

 김구는 효창 공원에 안장되었지만 그의 죽음의 흑막은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채심증만 분분하다. 그의 애국 정신은 고국 역사속에 깊숙이 뿌리 박혀 있다. 

 이역만리 만주벌판 또는 3,8선상에서 우방의 청년들과 조국의 청년들의 희생을 추모하며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감사 보은의 삶을 살기를 다짐해봅시다. 

 성경은 말합니다. “온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 할 지어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원하시고 그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시33:8,11). 선구자의 노래가 생각 난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을 두고 흐른다 지난-날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거친 꿈이 깊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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