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돌려달라” 여든둘 딸의 절규…야스쿠니 합사 희생자 후손들, 국내서 첫 소송
군인·군속 강제 징용 피해 유족 10명
일본 정부에 야스쿠니 합사 철폐 요구
위안부 판례 등으로 책임 추궁 기대

23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실에서 징용 피해자 유족,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야스쿠니 한국인 합사 철폐 소송 제소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고 끌려가서 전쟁터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한없이 불쌍해요. 내 인생을 걸고 일본과 싸워야 하나, 수없이 고민하다가 비로소 한국에서 소송하게 됐습니다.”
흑백 사진 속 아버지(고 이사현씨)는 여전히 젊은데, 딸은 어느새 팔순을 넘겨 머리가 희어졌다. 갓 돌 된 딸을 두고 일본군 소속 노동자로 중국에 끌려가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를 1980년대부터 찾아 헤맨 이희자(82)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는 1997년 일본 정부기록보존소 유수명부에서 아버지 이름과 함께 ‘합사제’라는 용어를 발견했다. 일본 전문가를 통해 합사제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단 뜻이란 걸 알게 된 그는 슬픔과 황당함을 넘어 모멸감을 느꼈다.
이 대표는 “그때 소송을 해서라도 아버지를 돌려받겠다는 결심을 했다”며 “일본이 무단 합사 당한 아버지를 돌려주지 않겠다는 건 여전히 한국을 식민지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국내서도 시작된 법정 투쟁

야스쿠니 신사 한국인 합사 철폐 소송 일지. 그래픽=신동준 기자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에 군인·군속으로 끌려간 한국인 희생자 유족 10명과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23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를 상대로 ‘야스쿠니 한국인 합사 철폐 소송’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했다고 밝혔다. 일본에선 지난 20여 년간 여러 차례 관련 소송이 진행됐지만,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유족들은 전사자 이름과 사망일 등이 기록된 야스쿠니 신사의 ‘제신명표’와 ‘제신부’ 등에서 한국인 희생자 이름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고, 총 8억8,000만 원 규모 손해배상도 청구했다. 일본 정부가 희생자들을 강제 동원해 전쟁터에서 사망에 이르게 했으며 야스쿠니 신사에 희생자 정보를 제공해 유족의 인격권과 종교·양심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취지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주요 전쟁에서 숨진 246만여 명을 신격화해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들의 위패가 보관돼 있다. 당시 한국 국적이거나 창씨개명된 한반도 출신 피해자도 약 2만 명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를 종교 시설로 포장하면서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국인 피해자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무단 합사된 사실은 1990년대 들어 처음 알려졌다. 시민단체와 유족들은 2001년부터 일본에서 합사 철폐 소송을 시작했다. 하지만 재한 군인·군속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소송과 1차 합사 철폐 소송은 모두 패소했고, 2013년 유족 27명이 제기한 2차 소송도 올해 1월 기각됐다. 일본 법원은 제척 기간(원고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정 기간)이 지나 소송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댔다. 다만, 판결과 별개로 “추모할 권리가 유족에게 있다”는 소수의견이 나오면서, 지난 9월 또 다른 유족이 제기한 ‘3차 소송’이 현재 진행 중이다.
“최근 판례 따라 일본 정부 책임 물을 것”

23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실에서 징용 피해자 유족,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야스쿠니 한국인 합사 철폐 소송 제소 기자회견을 한 뒤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유족들은 광복 80주년인 올해가 국내 소송의 최적기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했다. 그 동안에는 한 국가 법원이 다른 국가의 공권력 행사에 대해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관습법상 ‘국가면제(주권면제)’ 원칙 때문에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 대법원(2018년)이 강제노역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고, 서울중앙지법(2021년)과 서울고법(2023년)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한국 영토 안에서 당한 반인도적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면제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소송 대리인단장을 맡은 장완익 변호사는 “최근 위안부 소송에서 국가면제를 이유로 한국 법원 소송이 불가하다는 논리가 무너졌기 때문에 같은 논리로 국내 법정에서 일본 정부에 야스쿠니 신사 합사 철폐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 제기가 충분히 가능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일본 정부는 소장 자체를 송달받지 않겠지만 1년 후 공시 송달이 되면 강제 동원 노동자 소송 당시 일본 기업처럼 종교 법인인 야스쿠니 신사도 소송에 응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국내 소송이 한일 외교 관계 재정립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대리인단 부단장인 이상희 변호사는 “야스쿠니 신사 무단 합사 철회 운동은 20년이 넘었지만 한국 정부는 단 한 번도 이를 한일 협상 테이블에 올리지 않았다”며 “한국 법원 소송은 사법 절차의 의의도 있지만 유족에게 문제를 떠넘기지만 말고 한국 정부도 직접 나서 달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기자 nowlight@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