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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느끼며: 민병임 논설위원> 영원한 님, 이순신

이순신 장군(1545~1598)을 모르는 한국사람은 없다. 왜군과 싸워 23전 23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공으로 ‘성웅(聖雄) ’이라고 불리는 것도 다들 안다.

이순신의 내면을 다룬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 ‘(2001년)는 책상 오른쪽에 항상 놓여있다. 시간이 나면 가끔 읽고 또 읽는다. 작가는 책머리에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 하고 썼다.

최근,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영화 ‘노량:죽음의 바다 ‘(이순신역 김윤석)가 미국에서도 개봉되어 베이사이드 극장으로 보러갔다. 영화 ’명량 ‘(2014), 이순신역 최민식)과 ‘ 한산:용의 출현 ‘(2022, 이순신역 박해일)에 이어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를 다루었다.

1598년 음력 11월19일 새벽에 벌어진 이순신의 최대이자 최후의 전투인 영화 ’ 노량 ‘은 이순신, 명군 도독 진린, 명군 부총병 등자룡,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5명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임진왜란 발발 6년이 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조선에서 퇴각하려는 왜군을 섬멸하려는 이 싸움에서 적선 200여 척이 격침되고 50여 척이 도주했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다.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 이날 전쟁은 끝났다, 이순신의 나이 쉰넷이었다.‘(칼의 노래 인용) 노량대첩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지나 길고 긴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순신은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하며 진중일기 ’ 함경도일기 ‘를 남겼고 말년에는 ’ 난중일기 ‘를 남겼다. ‘ 난중일기 ’에서 그는 “부디 적들을 남김없이 무찌르게 해주소서. 이 원수를 갚을 수만 있다면 한몸 죽는다 한들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한다.

또한 기록 속에 피난길에 마주친 백성을 보고 말에서 내린 이순신은 “전쟁은 곧 끝나니 어떻게든 적에게 붙잡히지 말고 목숨을 보전하라”고 손을 잡고 위로한 내용이 나온다. 또 몰려든 피난민을 전선에 싣고 돌산도로 보내 살게 했다.

이 영화에서도 보듯 조선수군은 적의 머리를, 일본 수군은 적의 코를 베어 전리품으로 삼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병사 1인당 3개의 코를 베어 보내라고 했다. 전과에 급급한 병사들은 군인이 아닌 백성들도 무조건 죽인 다음 코를 베었고 커다란 항아리에 소금, 석회, 식초에 절인 코와 귀를 담아 일본으로 보내었다. 일본 교토시에 조선인 12만 6,000명의 코무덤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사와 100미터 거리다. 도요토미가 전공을 자랑하기 위해 만든 코무덤은 교토뿐아니라 후쿠오카, 오카야마, 쓰시마 등 일본 각지에 있다.

이순신의 죽음이 애달프지만 만약 그가 노량대첩에서 살아왔더라면 어땠을까. 선조 임금의 시기와 질투, 전쟁 중에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권력투쟁을 벌인 조정 대신들의 모함으로 그는 다시 백의종군했을 것이다. 아니다, 조정은 ‘왜 다 이긴 전쟁을 계속하여 병사들을 죽게 했느냐?’며 항명죄를 뒤집어씌워 죽였을 것이다.

그는 노량에서 잘 죽었다. 장수가 전투 중 죽었으니 가장 명예로운 죽음이다. 이순신이 살던 시절의 조선은 무오년, 갑자년, 기묘년에 잔혹한 사화가 있었고 개혁과 수구, 훈구와 사림은 정적이 되어 서로 물고 뜯고 싸웠다.

나이가 들수록 많은 사람들이 거짓과 불법을 보고도 이 나이에 무슨 참견을 하랴하고 못본 척 한다. 자신의 몸보신만 하며 사는 사람들을 보다가 영화지만, 비록 소설이지만, 신념에 따라 올곧게 살려는 사람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든다.

아, 제대로 살아야지 하는 반성을 하게된다. 영화 ’노량‘을 보고 나오면서 새삼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 당당하게 서있는 이순신장군 동상이 보고싶었다. 이순신 장군, 그는 평생 충의(忠義)에 따른 전쟁의 신이면서 백성을 사랑했다. 한국민에게는 영원한 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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