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봐도 엉터리”… 조작된 북한군 편지, 우크라이나는 왜 공개했나 [문지방]
탈북민이 본 ‘러 파병’ 북한군 편지글
엉성한 표현 “바로잡기도 어렵다”
우크라이나군 ‘심리전 수단’ 가능성
탈북민이 본 ‘러 파병’ 북한군 편지글
엉성한 표현 “바로잡기도 어렵다”
우크라이나군 ‘심리전 수단’ 가능성
“대충 훑어봤는데도 정말 생소해요. 한국말 좀 아는 통역이 만든 것 같습니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북한군의 손편지’라며 공개된 사진을 본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딱 봐도’ 엉터리임을 직감했다고 합니다. 지난달 24일 우크라이나 특수전사령부(SOF)가 러시아 쿠르스크 지역 전장에서 사살한 북한군 병사 품에서 발견했다며 텔레그램에 공개한 손편지를 두고 한 말입니다. 격자형 편지지에 ‘그리운 조선’으로 시작하는 4줄짜리 편지를 살펴보니, 북한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물론 어순과 표현 모두 흉내내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입니다.
북한에서 19년의 군 생활을 지내며 대위까지 지낸 김 대표는 “내가 병사였다면 이렇게 썼을 것”이라며 조목조목 SOF가 공개한 편지 내 표현의 오류들을 바로잡았습니다. 그가 보기엔 첫 줄부터 어색합니다. ‘그리운 조선, 정다운 아버지 어머니 품을 떠나’라는 부분에서 ‘조선’이란 표현 대신 ‘조국’이라는 표현을 쓰고, ‘정다운’이라는 표현도 ‘그리운’이나 ‘정든’으로 표현한다는 게 그의 설명입니다. ‘그리운 조국, 정든 아버지 어머니’쯤으로 시작해야 북한식 표현이라는 이야깁니다.
이어 ‘생일을 맞는 나의 가장 친근한 전우 동지인 송지명 동무’라는 둘째 줄 내용도 제대로 된 표현을 찾기 어려울 정도라고 합니다. 북한에선 ‘나의’라는 표현도 거의 쓰지 않고, ‘친근한’이란 단어는 주로 수령(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대상으로 쓰인다는 점에서 무례한 표현이라는 것이죠. 동지와 동무를 겹쳐 쓸 필요도 없습니다. 이 문장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김 대표는 “바로잡기도 어렵다”며 웃었습니다.
“조작 가능성 크지만… 뭔들 못할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로 파병된 북한 군인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신년 편지.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우크라이나군 특수부대로부터 입수해 19일 보도했다. WP 홈페이지 캡처
우크라이나에서 공개된 북한군 관련 자료들에 대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분석은 김 대표만 내놓는 게 아닙니다. 북한군 부소대장(상사) 출신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역시 “그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제시한 북한 관련 언급이나 자료 중에 신뢰가 떨어지는 것들이 꽤 있었다”며 “지금이야 생포된 두 명의 북한군이 나왔으니 그게 물증이 되겠지만, 앞서 나온 편지나 신분증 등에서도 앞뒤가 안 맞는 부분들이 계속 눈에 띄었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는 북한군의 첫 손편지 직후에도 ‘정경홍’이라는 북한군 병사의 수첩에서 발견됐다는 메모와 더불어 최근엔 “용기 백배해 싸워달라”는 김정은 위원장 명의의 손편지를 공개했는데, 이 편지들 또한 가짜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죠.
사실 ‘북한군의 손편지’가 국내에서 큰 관심을 끈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이 러시아에 파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북한군의 우크라이나전 참전을 입증할 확실한 물증으로 꼽혀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국내 주요일간지와 방송들은 대부분 이 소식을 빼놓지 않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탈북민은 물론 대북 전문가들이 봤을 때도 편지 내용이 너무나도 엉성하다는 분석이 이어지면서 사실상 이는 ‘우크라이나의 대외전략’을 위해 만들어진 편지일 가능성도 꽤나 높아진 모습입니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엄격하게 편지 내용에 대해 맞다, 틀리다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편지가) 조작됐을 가능성은 높다”면서도 “다만 모든 수단과 방법에 있어 모든 걸 총동원하는 게 전쟁이기에 이런 측면에서 조작 편지일지라도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우크라이나가 심리전 등을 위해 편지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편지가 가짜일 것으로 보는 김 대표 역시 “(우크라이나에 가 있을) 국정원 요원들이 돕기만 했어도 훨씬 완성도 높은 편지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합니다.
한국 도움 절박한데… 하필 불법계엄이
지난해 7월 윤석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대통령 관저인 마린스키궁에서 열린 한-우크라이나 정상회담에 앞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는 모습. 대통령실 제공
그렇다면 우크라이나는 왜 손편지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을 무릅쓴 채 북한군의 편지라며 국제사회에 서둘러 공개했을까요.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의 ‘절박함’이 반영된 편지라는 데 의견을 모읍니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 문제를 열심히 파서 진실을 꺼내놓으면 그래도 한국이 더 움직여주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라면서 “국정원과의 협력이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특수전사령부가 개별적으로 전략을 이행하며 벌어진 일일 가능성도 높다”고 봤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정부는 지금 젤렌스키 대통령 바람대로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과감한 결단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 놓였습니다. 12·3 불법계엄 직전까지도 우크라이나 특사의 한국 파견 등으로 추가 지원 논의가 활발했지만, 계엄사태 이후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과 ‘대통령 권한대행의 권한대행’ 체제까지 이어지면서 민감한 사안에 대한 결정을 쉽게 내리기 어려워진 탓입니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가 공개할 북한군 관련 정보를 둘러싼 논란은 이 같은 손편지를 비롯해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입니다. 홍 연구원은 “러시아 쿠르스크 전장에서 열세가 지속되는 분위기 속에 트럼프 대통령 취임으로 종전 가능성이 언급되는 상황”이라며 “끝까지 국제사회의 관심과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심리전 활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