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국가나 언론통폐합” 부인하던 신군부, 두 달 뒤 현실됐다

[계엄과 검열]② 해고, 농성, 고문
검열·보도지침으로 언론 통제한 신군부
기자들 ‘계엄 철폐’ 요구도 전부 검열돼
기자협회 제작거부 결의 직후 5.17 내란
언론인 해직, 고문, 탄압으로 정권 탈취

편집자주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 포고령 제3항은 권력이 언론을 암전한 45여 년 전의 악몽을 떠오르게 했다. 역사는 돌고 돌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격언을 상기시킨다. 독재 권력이 등장할 때, 가장 먼저 장악하려는 것이 언론이며 언론인은 독재자의 탄압과 가해를 가장 혹독히 겪는 직업군이다. 한국일보는 12·3 불법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1980년 전후 권력이 지운 352개의 기사를 발굴해 뒤늦게 독자들께 배달하면서, 비록 기사를 신문에 싣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취재하고 처절하게 맞섰던 당시 본보 기자들의 증언을 모으고 기록했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던 1980년 1월 12일, 한국일보 편집국에서 기자들이 민주 자유 언론을 위한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각 언론사의 젊은 기자들을 주축으로 벌어지던 검열 철폐와 자유언론 실천 요구도 모조리 '검열·삭제'돼 외부로 소식이 알려질 수 없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던 1980년 1월 12일, 한국일보 편집국에서 기자들이 민주 자유 언론을 위한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각 언론사의 젊은 기자들을 주축으로 벌어지던 검열 철폐와 자유언론 실천 요구도 모조리 ‘검열·삭제’돼 외부로 소식이 알려질 수 없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저항을 해도 저항한 사실 자체가 알려지거나 기록되지 못하면 ‘없었던 저항’이 된다. 신군부 비상계엄 체제하에서 언론은 세상에 벌어지는 진실을 보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전검열과 언론통제에 반발하는 언론인들의 저항 역시 전할 수 없었다.

1979년 10월 27일 비상계엄 선포 직후부터 1981년 1월 24일 계엄 해제 때까지 456일간 군부 검열로 삭제당한 한국일보 기사 원고 352건(요약 문건 포함) 중엔 언론 문제를 다룬 기사도 상당하다.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보도지침과 사전 검열로 언론을 통제하는 한편, 주요 언론사 간부들을 회유하는 ‘K 공작계획’도 벌였다.

민주화 요구가 고조되던 1980년 5월 한국일보를 포함한 주요 언론사들은 검열에 저항하는 ‘제작 거부’에 나서기로 결의하나, 이를 다룬 보도는 모두 검열로 삭제됐다. 신군부는 투쟁 일선에 섰던 기자협회 간부들을 불법체포하고 고문했다. 이후 그해 연말까지 최소 1,000명이 넘는 언론인이 강제해직됐고, 11월에는 전국 64개 언론사가 18개로 강제통폐합되는 데 이른다.

본보가 이민규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를 통해 입수한 군부 검열 기사 중 언론 자유 등을 주제로 썼다가 삭제당한 기사 일부를 소개한다.

https://youtube.com/watch?v=ogdM1IukHkA%3F%26wmode%3Dopaque

<1>’언론 자유’ 언급한 장관 발언 기사

제목 : 국회 정책 질의 내용 중에서. 1979년 11월 30일 추정. 부분 삭제

신현확 경제기획원 장관은 계엄당국과 정부는 평화와 질서를 유지할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판단될 때에는 언제든지 계엄을 해제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정부는 계엄이 해제되면 언론의 자유 증진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2>’계엄 철폐’ 요구한 기자 총회 기사

제목 : 한국일보 기자 총회(KBS 보도) 1980년 5월 9일 추정. 전면 삭제

한국일보 기자 150여 명은 어제밤 12층 강당에 모여 2시간 동안 총회를 갖고 계엄 철폐와 언론 사전검열 폐지, 동아, 조선 해직 기자(①)와 동료 기자들의 복직을 요구했읍니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그래픽=김대훈 기자

노향기 기협분회장 주재로 열린 기협분회 총회에서 기자들은 오는 10일까지 결의문을 작성하도록 기협회장단에 위임했으며 다른 회사보다 낮은 급료에 대한 인상 투쟁도 벌이기로 했읍니다. 기자들은 각기별, 총별 회의를 거쳐 급료 기준을 정한 뒤 장강재 회장이 귀국하는 대로 급료 인상 요구안을 내기로 했읍니다.

또한 경향신문 기자 10여 명도 어제밤 7시 반부터 회사 편집국에 모여 3시간 동안 편집국 총회를 열었읍니다. 편집국장과 부.차장들도 참석한 총회에서 언론의 검열 여부 문제가 논의됐읍니다. 기자들은 검열 거부 시한을 논의했으나 결정하지 못하고 산회했는데 각부 대표들이 각부의 의견을 집약한 뒤 다시 총회를 열어 검열 거부의 시한 문제를 결정짓기로 했읍니다.

또 합동통신사에서도 각기별 관리 위원 30명이 어제밤 8시부터 중앙일보 사태와 자유 언론 문제를 논의 오늘 오후 7시 편집국 총회를 열고 중앙일보 사태, 자유언론실천 문제 등을 토의하기로 했읍니다.

<3>한국일보와 자매지 기자들 선언문 기사

제목 : 언론 회복 등을 선언(기협 한국일보 분회). 1980년 5월 13일. 전면 삭제

한국일보 및 자매지 기자 2백여 명은 12일 하오 7시 30분 한국일보 편집국에서 긴급 총회를 열고 비상계엄과 이에 따른 보도 검열을 해제할 것을 총회의 결의로 촉구했다. 이날 기자들은 총회에서 [원래 대한민국 기자들의 직업적 사명은 모든 인간적 가치가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와 문화의 건설을 위하여 겨레의 고통과 소망을 대변하는 일이라고 규정하고 현재의 비상계엄과 이에 따른 보도 검열은 언론의 본질적 사명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라고 말했다. 기자들은 지난 ○일의 기자총회결의를 천명하는 선언문을 통해 [보도 검열은 민중과 언론 사이에 불신을 조장함으로써 기자의 직업적 위신을 훼손했으며 새 시대를 향한 우리들의 매체 기능을 파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자들은 이날 선언문에서 새로운 우상숭배를 거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해 나갈 것을 다짐하고 기자들의 직업적 성실성을 회복, 새 질서 건설에 동참하기 위하여 보도 검열의 조속한 해체를 요구했다. 기자들은 이어 새로운 언론 문화의 정착을 위하여 개헌안에 편집 권리 독립과 언론의 자유가 신성불가침한 조항으로 보장될 것을 촉구했다. 기자들은 또 △비상계엄과 이에 따른 보도검열을 조속히 철폐할 것 △권세에 부화뇌동하여 사를 탐해온 아세곡필의 사이비 언론인들은 본인과 언론 문화의 발전을 위하여 현직에서 물러날 것 △언론 기관은 자유 언론 투쟁으로 해직된 기자들을 명예롭게 복직시키는 것으로써 역사 앞에 반성할 것 등 3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1980년 5월 작성된 언론 검열 보고서. 한국일보가 쓴 '언론 회복 등을 선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전면 삭제 조치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민규 중앙대 교수 제공

1980년 5월 작성된 언론 검열 보고서. 한국일보가 쓴 ‘언론 회복 등을 선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전면 삭제 조치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민규 중앙대 교수 제공

<4>제작 거부와 기자협회 간부들 연행 기사

제목 : 검열 철폐 요구·제작 거부. 1980년 5월 27일. 전면 삭제

5개 일간지 2개 통신·일부 방송 기자들

기자협회장단 5명 연행·계엄사

한국기자협회 김태익(김태홍의 오기로 보임) 회장, 고영재 부회장 등 회장단 5명이 지난 17일-20일 사이에 계엄당국에 연행됐다. 연행 이유는 27일 현재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국기자협회는 지난 16일 서울 지역 분회장 회의를 열어 당국의 일방적인 언론 검열을 5월 20일부터 전면 거부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었다.(②)

그래픽=김대훈 기자

그래픽=김대훈 기자

이에 따라 경향신문을 비롯 중앙·동아·한국·신아일보 등 서울 시내 5개 종합 일간지와 합동·동양 등 2개 종합 통신 및 일부 방송 기자들은 지난 20일부터 언론에 대한 검열 철폐를 요구하며 신문과 뉴스의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기자들은 각 회사별로 기자협회 분회 총회를 열고 현재와 같이 엄격한 검열 지침 아래에서 신문을 제작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진실을 알리기보다는 왜곡된 사실을 전달, 여론을 오도할 뿐이라고 결론짓고 제작 거부를 결의한 것이다.

5·18 민주화 운동 사흘차였던 1980년 5월 20일, 한바탕 투석전이 벌어진 광주 금남로 거리에 한 청년이 쓰러져 있다. 주변 계엄군의 서슬에 겁을 먹은 여성은 그를 도울 수도 지나칠 수도 없는 심경이었을 것이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계엄군이 철모를 내려놓고 방독면을 고쳐 쓰고 있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 작전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5·18 민주화 운동 사흘차였던 1980년 5월 20일, 한바탕 투석전이 벌어진 광주 금남로 거리에 한 청년이 쓰러져 있다. 주변 계엄군의 서슬에 겁을 먹은 여성은 그를 도울 수도 지나칠 수도 없는 심경이었을 것이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계엄군이 철모를 내려놓고 방독면을 고쳐 쓰고 있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 작전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기자들은 특히 최근 광주 사태와 관련, 사태의 배경이나 직접적인 원인, 확산 과정 등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이 당국의 일방적인 발표문을 보도함으로써 독자들에 사태의 진상을 잘못 알리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신문을 제작하기보다는 차라리 신문의 발행을 중지시키는 것이 기자들의 최소한의 양심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5>언론통폐합 언급 기사①

제목 : 국내신문 통·폐합설은 낭설. 1980년 9월 18일. 전면 삭제

로스앤젤레스를 방문 중인 국보위의 오자복 문공위원장은 16일 항간에서 떠돌고 있는 국내 신문 통·폐합 소문은 전혀 낭설이며 그와 같은 작업은 정부가 추진한 적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③) 이날 L.A 지역 신문 발행인 편집국장 및 남가주 한국 학교 임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오 위원장은 일부 중공업 분야 통폐합을 불필요한 경쟁을 막고 기업을 성장시키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으나 신문 통폐합은 있을 수도 없는 것이며 그와 같은 루머의 근원지를 찾으려고 정부 관계 기관도 조사해 본 일까지 있다고 밝혔다. 오 위원장은 국내통신사를 하나로 통합한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그것도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있는 관영통신 체제이며, 우리나라에서는 기존 통신사가 존속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오 위원장(육군소장)은 국보위가 생긴 것은 제2의 월남의 운명을 막기 위한 긴급조치였으며 군은 곧 군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말하고 이 기구에 참여하고 있는 대부분의 현역 군인들은 원대 복귀할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오 위원장은 L.A를 비롯 워싱턴 뉴욕 등지를 방문키 위해 15일 미국에 도착했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그래픽=김대훈 기자

<6>언론통폐합 언급 기사②

제목 : 언론 통폐합 결정한 바 없다. 1980년 11월 1일. 전면 삭제

이광표 문공장관은 1일 항간에 나돌고 있는 언론기관의 통폐합설에 대해 정부가 자체적인 노력에 의한 통폐합을 권장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결정도 없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이날 입법회의 예결위에서 [언론통폐합설이 근거가 있는 것인가]라는 김윤환 의원의 질문에 대해 이같이 답변했다. 이 장관은 우리의 경제 현 여건 등 여러 가지 여건과 다른 나라와의 경우를 비교하여 신문이나 방송의 숫자가 적정한가를 생각하면 개인적인 견해로는 다소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으나 언론 기관이 통폐합을 할 경우 자체적인 결정과 스스로의 적법 절차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한 다음 정부가 자체적인 노력으로 통폐합하는 것은 권장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결정한 바가 없다고 덧붙였다(④). 이 장관은 이어 정부와 언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대립이 아니고 상호 협조하여 새 시대의 민주복지국가 건설에 공동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그래픽=김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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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46년 만의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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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유대근 기자 dynamic@hankookilbo.com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최은서 기자 sil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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