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태어나면 미국인”… 美대법, ‘출생시민권’ 폐지 막았다

‘反이민’ 행정명령에 위헌 판단
트럼프, 판결 뒤집을 입법 주문
‘상호관세 무력화’ 이어 또 타격

지난달 30일 미국 워싱턴 연방대법원 청사 앞에서 이민 옹호 활동가들이 대법원의 출생시민권 유지 판결을 환영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미국 연방대법원이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출생시민권’의 폐지를 막았다. 헌법에 도전하는 대통령 행정명령의 한계를 새삼 환기시키면서다. 강경 ‘반(反)이민’ 정책을 추진해 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안 모색 의지를 드러냈다.

오랜 약속 vs 원정 출산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대법원은 출생시민권을 금지하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대법관 9명 중 6명이 이에 동의했는데, 보수파 6명 중 3명이 진보파에 가세한 결과다.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1기 마지막 해인 2020년 임명한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은 상호관세 부과를 저지하고 우편 투표 관행을 지지한 데 이어 다시 전향했다.

대법관 5명은 행정명령이 수정헌법 14조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남북전쟁 직후인 1868년 채택된 해당 조항은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귀화한 사람은 모두 미국 시민으로 규정한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다수 의견에서 “시민권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권리를 갖기 위한 권리, 즉 우리 정치 공동체에 자유롭게 참여할 권리”라며 “수정헌법 14조를 제정한 선조들은 그 약속을 이 땅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확대 적용했다. 우리는 오늘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1기 집권 때 뽑은 브렛 캐버노 대법관은 해당 명령이 위헌은 아니지만 연방법을 위반했다고 봤다.

반대 의견은 수정헌법 14조의 해석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은 “오늘 대법원 해석대로라면 수정헌법 14조가 ‘출산 관광객’ 자녀에게도 시민권을 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흑인인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은 수정헌법 14조가 해방된 흑인들의 평등권을 보장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짚었다.

이날 판결은 지난해 1월 20일 취임 첫날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출생시민권 제한 행정명령의 적법성을 따진 것이다. 이 명령에 따르면 불법 체류자는 물론 학생·취업·관광 비자 등으로 합법적이지만 일시적인 체류 자격만 갖게 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도 시민권을 취득할 수 없다. 이에 진보 성향 주(州)와 시민권 단체 등이 소송을 제기했고 1, 2심 법원 모두 행정명령을 위헌이라 판결하며 효력을 정지시켰다. 트럼프 대통령은 ‘원정 출산’을 막으려면 시민권 부여 범위를 좁혀야 한다고 줄곧 요구해 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수정헌법 14조에는 불법 체류자의 자녀에게 시민권을 줄 의도가 없었다며 항소했다.

“시진핑과 중국의 승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미 워싱턴의 힐튼 호텔에서 열린 ‘신앙과 자유 연합’의 연례 정책 콘퍼런스 행사에 참석해 연설하던 도중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의 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편은 판결을 환영했다. 원고를 대리한 시민단체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측은 이날 성명에서 “이번 대법원 결정은 ‘여기서 태어났으면 시민이다. 대통령은 행정명령으로 헌법을 대체할 수 없다’는 미국의 근본적 약속을 재확인했다”고 논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감을 표명하고 집권 공화당에 판결을 뒤집을 입법을 주문했다.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 “의회는 돈이 많이 들고 불공정한 출생시민권을 끝내기 위한 작업을 오늘 시작해야 한다”고 썼다. “시진핑 국가주석과 위대한 나라 중국이 출생시민권 문제에서 거둔 엄청난 승리를 축하한다”고 비꼬기도 했다. 법무부는 고의로 법을 어기는 원정 출산을 강력히 단속하겠다고 선언했다.

보수파 우위인 대법원이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정책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은 처음이 아니다. 올 2월 상호관세를 무효로 만든 데 이어, 전날엔 트럼프 대통령의 리사 쿡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이사 해임을 막고, 선거일 이후 도착한 우편 투표를 유효표로 집계하는 일부 주의 제도를 합법으로 판단했다.

다만 이날 별도의 두 판결은 트럼프 대통령의 뜻대로 됐다. 대법원은 성전환자(트랜스젠더)의 여학생 스포츠팀 참여를 금지한 일부 주 법률을 합헌으로 판단하는 한편, 정당 선거 지출 한도 무효화로 공화당을 기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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