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다섯 명이 건물 옆 난간에 매달려”… 역삼동 건물에 불 지르고 달아난 70대 검거
나민서 기자 외 3명
역삼동 특허법인 2곳서 연쇄 화재 발생
“사무실 입구서 불길, 유리창 깨고 탈출”
방화 혐의 70대 남성 동묘앞역서 검거
4년 전에도 같은 건물 방화 예비로 구속
“특허법인이 사기 쳐, 3일 전 범행 준비”

20일 불이 난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 빌딩에서 소방관들이 현장을 수습하고 있다. 뉴시스
서울 강남구 역삼동 건물 두 곳에서 방화로 잇따라 화재가 발생해 19명이 다치고 수십 명이 긴급 대피했다. 경찰은 두 건물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 70대 남성을 4시간 만에 붙잡았다. 사무실이 밀집한 한낮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사건이라 하마터면 대형 참사로 번질 뻔했다.
소방에 따르면, 20일 오전 11시 54분쯤 역삼동 신명빌딩에서 첫 화재 신고가 접수됐다. 7분 뒤인 12시 1분쯤에는 한양빌딩에서도 화재가 발생했다. 두 건물은 200~300m가량 떨어져 있다. 불이 난 사무실에는 공통적으로 특허법인이 입주한 것으로 파악됐다.
신명빌딩에선 중상자 2명과 경상자 9명 등 11명이 병원으로 옮겨졌다. 중상자 중 1명은 심정지 상태에 빠져 심폐소생술을 받은 뒤 자발순환을 회복했다. 다른 1명은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어 화상 전문병원으로 이송됐다. 건물에 있던 60명은 자력으로 대피했다.
한양빌딩에서는 중상자 3명과 경상자 5명 등 8명이 다쳤다. 당초 모두 경상으로 분류됐으나 이송 과정에서 환자 상태가 달라져 3명이 중상으로 재분류됐다. 중상자들은 심한 호흡곤란 증상을 겪거나 피부 열상 등을 입었다.
소방당국은 인력 291명과 장비 56대를 동원해 불길을 잡았다. 한양빌딩 화재는 낮 12시 35분쯤, 신명빌딩 화재는 오후 2시 20분쯤 완전히 꺼졌다.

그래픽=강준구 기자
서울 수서경찰서는 사건 발생 4시간 뒤인 오후 4시 16분쯤 서울 지하철 동묘앞역 인근에서 방화 혐의를 받는 이모(77)씨를 검거했다. 경찰은 두 사건 모두 이씨 소행으로 파악했다. 이씨는 4년 전에도 같은 건물에 불을 지르려 준비한 혐의(방화 예비)로 구속된 전력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 관계자는 “이씨가 이날 오전 11시 이전 강서구 주거지에서 인화성 물질로 추정되는 물건을 들고 나왔다”며 “범행 후 택시와 도보로 동대문구로 이동한 사실을 확인하고 인접 관서와 공조해 긴급체포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특허법인에 앙심을 품고 방화를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 오후 6시 20분쯤 수서경찰서로 호송된 이씨는 ‘특허법인에 악감정이 있었냐’는 취재진 질문에 “2000년도에 특허를 냈는데 (특허법인이) 사기를 쳤다”며 “앞으로 사기 치지 말라”고 말했다. ‘범행을 언제부터 준비했느냐’는 질문에는 “3일 됐다”고 답했다. 경찰은 이씨를 상대로 구체적인 범행 동기와 수법 등을 조사할 예정이다.

20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화재 현장에서 대피한 시민 조모씨가 대피 과정에서 신발에 묻은 혈흔을 보여주고 있다. 서준민 기자
사건 현장은 아수라장이다. 불이 꺼진 뒤에도 매캐한 탄내가 진동했고, 깨진 유리창 파편과 부서진 집기 등 필사적으로 탈출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한양빌딩 4층에서 근무하는 50대 남성은 “신입 변리사가 외부인과 대화하고 방으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불꽃이 번졌다”며 “입구 쪽에서 불이 나 사람들이 반대쪽으로 피했고, 유리창을 깨고 화단으로 나와 비상계단으로 대피했다”고 말했다. 같은 층에서 일하는 조모(47)씨도 “사무실 입구가 불에 탔고 안쪽은 천장만 녹아내렸다”며 대피 과정에서 깨진 창문 등에 다쳐 혈흔이 묻은 슬리퍼를 보여줬다.
화재를 목격한 시민들도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당시 상황을 전했다. 신명빌딩 앞 미용실에서 일하는 50대 허모씨는 “여성 네다섯 명이 건물 옆면 난간에 매달려 있는 것을 봤다”며 “안쪽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모습도 보였다”고 말했다. 주변 건물에서 일하는 50대 신선영씨는 “불이 난 사무실 직원들이 울면서 ‘수상한 사람이 액체를 들고 왔다가 내려간 뒤 불이 났다’고 말했다”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 나민서 기자iam@hankookilbo.com
- 이정혁 기자dinner@hankookilbo.com
- 서은재 기자sej@hankookilbo.com
- 서준민 기자stan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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