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부 격차 지우려 ‘시멘트 벽’ 세웠다… 멕시코 ‘월드컵 워싱’의 현장 [최주연의 스포 주의]

멕시코 주 정부, 빈민 지역 가리려 회색 장벽 세워
실종자 광장엔 1m 높이의 화분 가림막 촘촘히
세계 축제와 함께 반복된 월드컵 워싱의 역사
“주민 삶을 보이지 않게 지워버리려는 모든 차별적 행위를 즉각 중단”

편집자주

이야기 결말을 미리 알려주는 행위를 ‘스포일러(스포)’라 합니다. 어쩌면 스포가 될지도 모를 결정적 이미지를 말머리 삼아 먼저 보여드릴까 합니다. 무슨 사연일지 추측하면서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한 장의 사진만으로 알 수 없었던 세상의 비하인드가 펼쳐집니다.

지난달 22일 멕시코 몬테레이 스타디움에서 공항까지 가는 간선도로 인근에 판자촌을 가리기 위한 형형색색의 벽이 설치돼있다(왼쪽 사진). 벽이 채 가려지지 않은 곳에 허름한 집이 보인다. 몬테레이=최주연 기자

지난달 22일 멕시코 몬테레이 스타디움에서 공항까지 가는 간선도로 옆으로 판자촌을 가리기 위한 가림막이 설치돼있다. 몬테레이=최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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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2일 멕시코 몬테레이 스타디움에서 공항까지 가는 간선도로 옆으로 이어진 벽이 부서져있다. 이 벽은 정부가 설치한 벽에 의해 출근길이 막힌 시민이 분노해 직접 부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몬테레이=최주연 기자

“저 집에 사는 사람은 출근길을 막는다고 벽을 부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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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열기가 한창인 멕시코 몬테레이, 공항과 월드컵 경기장을 잇는 간선도로에서 택시기사가 별안간 속도를 늦췄다. 도로를 따라 끝없이 이어지던 회색 시멘트 벽의 무너진 틈에서 2층짜리 주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저 도로의 경계라 생각했던 벽 너머에는 도시 빈민들의 밀집 주거 지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본보는 지난달 14일 월드컵 개최도시인 멕시코 몬테레이 도심 곳곳을 다니며 월드컵 워싱의 흔적을 찾았다. ‘카르텔의 나라’, ‘여행 위험국’으로 알려진 멕시코 당국이 이미지 쇄신과 관광 활성화에 심혈을 기울이는 가운데, 개최 도시 지방정부인 누에보레온주 주 정부는 환경 개선이라는 명목으로 빈민 지역과 실종자 광장 등을 외부와 차단하는 가림막을 설치했다. 이에 시민들은 스포츠의 열기로 사회 문제를 감추고 미화하는 행위인 ‘월드컵 워싱’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6월 22일 멕시코 몬테레이 스타디움에서 공항까지 가는 길에 빈민촌을 가리기 위한 가림막이 설치돼있다. 몬테레이=최주연 기자

지난 6월 22일 멕시코 몬테레이 스타디움에서 공항까지 가는 길에 빈민촌을 가리기 위한 가림막이 설치돼있다. 몬테레이=최주연 기자

2021년 멕시코 몬테레이 과달루페 빅토리아 지구 구글맵에 촬영된 해당 지역 주민들의 모습. 구글 맵 캡처

도시 빈민들의 일상에 침입한 회색 장벽

주 정부가 설치한 장벽에 막혀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과달루페 빅토리아(Guadalupe Victoria)’ 지구는 멕시코의 전형적인 저소득층 주거단지다. 녹슨 양철 지붕과 투박하게 쌓아 올린 벽돌집이 눈에 띄지만, 바로 옆 골목으로 접어들면 화단이 잘 정비된 주택도 나타나는 등 평범한 이웃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실제로 구글 맵 로드뷰로 들여다본 이곳의 일상은 가족들이 집 앞에 모여 앉아 밥을 먹고 두런두런 수다를 떠는 여느 동네와 다름없다.

현지 언론 ‘엘노르테’ 등에 따르면 이 회색 장벽이 세워진 시점은 월드컵 준비가 본격화된 시기와 맞물린다. 실제로 본보가 2024년 10월의 구글 맵 로드뷰를 확인해 본 결과, 당시만 해도 해당 구역에는 철사로 된 간이 펜스만 쳐져 있었을 뿐 시멘트 벽은 존재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이에 분노하고 있다. 시민들에 따르면 한 주민은 평소 출근하던 길에 시멘트 벽이 등장하자 장비를 동원해 이를 부쉈다.

인근 동네 주민인 프랑코 카스트로(23)는 “다른 우범지대에 비해 그리 위험한 곳도 아니고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 중 하나일 뿐”이라며 “주민들이 마치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벽 뒤로 숨기려는 행태는 이들을 철저히 소외시키는 낙인처럼 느껴진다”고 토로했다.

지난달 24일 멕시코 몬테레이 실종자광장에 실종된 이들을 기리는 벽화와 포스터가 전시돼 있다. 몬테레이=최주연 기자

지난 6월 24일 멕시코 몬테레이 실종자광장에 광장을 가리기 위해 설치된 화분에 실종자 가족들이 전단을 붙였다. 몬테레이=최주연 기자

지난달 24일 멕시코 몬테레이 실종자광장을 방문한 멕시코 시민들이 애도의 시간을 갖고 있다. 몬테레이=최주연 기자

실종자 광장엔 1m의 화분 가림막

멕시코 당국이 가리려 한 치부는 가난만이 아니었다. 정부 공식 통계상 누적 실종자 수가 이미 11만 명을 돌파하며 전국적으로 실종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도 역시 월드컵 워싱의 표적이 됐다.

몬테레이 중심가에 위치한 ‘실종자 광장(Plaza de los Desaparecidos)’은 마약 전쟁과 치안 부재로 가족을 잃은 이들이 직접 전단지를 붙이며 투쟁해 온 상징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지난 6월 초, 주 정부는 이 광장 주변을 둘러싸고 1m 높이의 거대 화분들을 기습적으로 설치했다. 시멘트 벽에 이어 도심 한복판에서 또다시 시민들의 목소리가 가려진 것이다.

누에보레온주 실종자 가족 단체인 ‘푼덴엘(FUNDENL)’ 등 인권 단체들은 거세게 반발하며 시위를 벌였다. 실종자 가족들은 정부가 세운 화분 위에 자녀들의 전단을 다시 빼곡하게 붙이며 맞서기도 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누에보레온주 인권위원회(CEDHNL)는 “소외된 공간과 주민들의 삶을 보이지 않게 지워버리려는 모든 차별적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며 공식 권고를 발령하기도 했다.

지난달 11일 월드컵 거리 응원이 열리는 멕시코 과달라하라 대성당 앞에서 실종자 관련 단체가 빨간 그물을 만드는 시위를 하고 있다. 빨간색은 마약 카르텔 등 강력 범죄로 인해 실종자와 실종자 가족이 받는 고통을 의미하고 그물은 실종자를 둘러싼 연대를 의미한다. 과달라하라=최주연 기자

지난달 11일 월드컵 거리 응원이 열리는 멕시코 과달라하라 대성당 앞에서 실종자 관련 단체가 실종자들의 얼굴과 정보가 담긴 포스터를 몸과 우산에 붙이고 빗속에서 행진 시위를 하고 있다. 과달라하라=최주연 기자

지난달 24일 멕시코 몬테레이 실종자광장 앞에 월드컵 워싱 관련 항의 문구가 붙어있다. 우승컵 뒤에 공권력이 있다는 뜻. 몬테레이=최주연 기자

세계 축제와 함께 반복된 월드컵 워싱의 역사

국제 대회를 치르기 위해 주민들의 삶과 사회적 비극을 지우려는 시도는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6년 브라질 리우 올림픽 당시에도 정부는 공항에서 경기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을 따라 대표적인 빈민가인 ‘파벨라(Favela)’를 막기 위한 21km의 대형 장벽을 설치한 바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 멕시코 몬테레이에서 ‘고식지계’식 대회 준비는 고스란히 반복되는 중이다.

몬테레이 출생 루이스 랜던(22)은 “이와 같은 월드컵 워싱은 사회에 대한 모독이자 정부의 무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며 “보이지 않게 가려버리는 행위는 단순히 현실을 지워버리려는 시도에 불과하며 오히려 정부의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역대 월드컵 최다 개최국이라는 타이틀을 부여받은 멕시코의 화려한 무대 뒤편에는, 일상을 침해당한 주민들과 강제로 지워진 사회적 비극의 목소리가 공존한다. 축제의 환호 속에 주민들의 한 맺힌 원성이 묻히는 가운데, 멕시코 정부는 이 거대한 축제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사회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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