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승호 칼럼: “고국 대통령이 남긴 인생 역정의 실상”
일찍이 이조5백년의 당쟁비사, 일제 36년의 억압, 8.15해방, 6.25의 이데올르기의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념 싸움과 4.19의 민권 회복 항거와 5.16에 이르기까지 작은 나라치고 변화무쌍한 격동에서도 모질게 살아 온 역사 속에 청춘을 바친 초대 건국 대통령의 빛과 그림자를 남긴 우남 ‘이승만’(1875-1965, 3. 26생)을 소개한다.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 20세 때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워 영어 교사가 된 후 1896년 서재필과 독립 협회를 조직, 독립신문, 협성회보, 매일신문 주필을 지내면서 만민 공동회를 개최, 민중의 개화와 독립운동에 앞장서 친일 정부를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하다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으나 7년 만에 민영환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미국으로 출국, 조지 워싱턴, 하버드 대학서 석사를 받고 1910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 고국이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귀국, 이상재 등과 기독청년들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하다 투옥되었으나 미국 선교사의 주선으로 풀려나와 1912년 다시 미국 하와이로 가서 기독 학원과 군관 학교를 세웠다.
광복 후인 1948년 7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그 해 8월 15일 취임하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건국이념을 내세우고 철저한 배일 정책과 반공 정책을 기본으로 자유당을 배경으로 장기 집권이 이어지는 부패로 1960년 4선이 되었으나 3.15 부정 선거로 학생들과 시민들이 독재에 항거로 1960년 4월 26일 대통령직을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하여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1965년 7월 19일 세상을 떠나 국립묘지에 묻혔다.
그의 치적이라면 국가를 제대로 설계하려고 노력했고, 그가 설계한 표현의 자유, 대통령 직선제, 의무교육 실시, 삼권 분립의 원칙합의, 여성 참정권 허용, 반공포로 석방, 시장 경제체제 확립, 한미 동맹 구축, 농지 개혁 등은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말이 있듯이 한평생 조국 광복을 위해 바쳤지만 외교의 귀재라는 그가 내치(內治)에는실패한 이유라면 자신은 청렴했지만 적재 적소에 인재들을 등용하지 못하고 직언자보다 권모술수자들의 농간에 재물이 되고 만 것이다.
당시 모 장관이 대통령이 방귀만 뀌어도 아부하느라고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한 말이 유행했던 시대 였으니, 동포 사회서도 인사가 만사라는 말을 음미해 볼일이다.
인생무상이요 만월이면 기우는 이치를 음미해 보면서 그의 주요 저서는 독립정신, 일본 내막기 등이 있다.
성경은 말합니다.“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