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대 오른 로드리게스…트럼프와 마두로 잔당 사이서 ‘줄타기’

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 “외세 간섭 못해”
미, 내부 강경파엔 “협조 안하면 목숨 위협”
베네수엘라 ‘공포 체제’ 회귀 지적도

델시 로드리게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권한대행이 5일 카라카스 국회의사당에서 임시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카라카스=신화 뉴시스

델시 로드리게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권한대행이 5일 카라카스 국회의사당에서 임시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카라카스=신화 뉴시스

델시 로드리게스 베네수엘라 임시 대통령이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의 강경파와 미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베네수엘라 정국을 관리하면서도, 내부 강경파 인사들의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해 반미 목소리도 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WSJ에 따르면 로드리게스는 이날 산업 부문 관계자 회의에서 “베네수엘라 정부가 우리나라를 책임지고 있다”며 “다른 누구도 베네수엘라를 통치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일 마두로를 미국으로 압송한 뒤 “정권 이양이 이뤄질 때까지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운영(run)하겠다”고 한 발언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으로 풀이된다.

로드리게스는 또한 미국의 마두로 생포를 “절대적으로 불법”이라며 “우리는 항복하지 않는 민족이며, 포기하지 않는 민족”이라고도 강조했다. 로드리게스가 4일 트럼프 행정부에 “외부 위협이 없기를 바란다”며 협력 의지를 내비친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강경해진 태도다.

이에 대해 마두로 정권의 강경파와 미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로드리게스의 생존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WSJ는 “과도기 리더십의 아슬아슬한 균형 잡기”라며 “미국의 압력을 견뎌내는 동시에 정부가 파벌 싸움으로 와해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라고 짚었다. 미국과의 지나친 밀착은 정부 내 주요 권력 실세들인 강경파 인사들의 반감을 불러와, 되레 로드리게스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AFP통신도 “로드리게스가 미국에 유화적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군과 민병대를 장악한 베네수엘라 강경파의 지지도 잃지 않으려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4일 메릴랜드주 앤드루스 공군기지로 향하는 미 에어포스원 내에서 기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미 에어포스원=AP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4일 메릴랜드주 앤드루스 공군기지로 향하는 미 에어포스원 내에서 기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미 에어포스원=AP 뉴시스

그러나 미국은 로드리게스의 ‘협조’를 기정사실로 보고 있다. 미군 고위직 출신 예비역은 AFP에 “로드리게스가 미국 기업에 베네수엘라의 석유·광산을 개방하고, 마두로가 2019년 단절한 외교 관계를 복원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베네수엘라가 미국에 제재 대상 석유 3,000만에서 5,000만 배럴을 인도할 것”이라고 밝힌 점도, 사실상 로드리게스가 미국의 요구를 대폭 수용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미국 입장에서도 마두로 정권의 강경파 인사들은 문젯거리다. 로드리게스와 미국 사이의 불협화음을 유발하고 있어서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정부는 최근 마두로 정권의 ‘실세’인 디오스다도 카베요 내무부 장관에게 “로드리게스 임시 정부에 협조하지 않으면 마두로와 같은 운명을 맞거나 생명을 잃을 수 있다”고 위협한 것으로 전해졌다. 카베요 장관은 반정부 세력 탄압에 앞장 선 강경파로, 로드리게스와는 정치적 라이벌 관계다.

미국이 로드리게스 임시 정권을 인정하면서 베네수엘라가 ‘공포 체제’로 회귀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베네수엘라 당국은 최근 주요 도로와 주거 지역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군경을 동원한 불시 검문에 나서 반정부 인사들을 색출하고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야권 지도자인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가 “베네수엘라의 안정을 위해 자신이 차기 지도자가 돼야 한다며 귀국 의사를 밝히고 있는 것도 향후 정국의 변수로 꼽힌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 오슬로=AP 뉴시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 오슬로=AP 뉴시스

한편, 마두로 체포 이후 미국에 거주하는 베네수엘라 출신 이민자 60만 명이 추방 위기에 놓였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액시오스에 따르면 댄 골드먼 하원의원(뉴욕·민주)은 5일 이민세관단속국 시설을 방문한 뒤 “마두로 체포 이후, 국토안보부가 베네수엘라인 본국 송환 가능성을 다시 검토하고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매슈 트래거서 미국 시민권·이민국(USCIS) 대변인도 “트럼프 대통령의 마두로 제거는 베네수엘라인들에게 전환점이 될 것”이라며 “이제 그들은 사랑하는 나라로 돌아가 미래를 재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베네수엘라 출신 이민자들은 그동안 내전이나 재난 등 안전한 귀환이 어려운 국가 출신 이민자에게 일시적으로 허용한 임시보호신분(TPS)을 통해 합법 체류와 취업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4월 트럼프 행정부가 TPS 신규 부여 조치를 종료하면서 2023년(34만 8,000명)과 2021년(26만 8,000명)에 TPS 지위를 받은 베네수엘라인들의 신분 보호도 차례로 만료됐다. 이에 따라 60만 명 안팎의 베네수엘라 출신 이민자가 추방 대상이 될 수 있다.

정지용 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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