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진 “롱런의 비결? 답은 없어… 대본 놓지 않는다” [인터뷰]

관록의 배우 유해진, 엄흥도 役
역사 속 짧은 기록, 행간에 숨을 불어 넣다
오는 2월 4일 개봉 예정

배우 유해진이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돌아온다. 쇼박스 제공

배우 유해진이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돌아온다. 쇼박스 제공

배우 유해진의 연기를 장르로 규정하는 건 무의미하다. 어떤 작품에서든 기대를 뛰어넘는 연기를 펼쳐 온 독보적인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의 장르를 꼽자면 단연 사극이다. 한국 배우 가운데 유해진만큼 사극에 어울리는 배우는 없다. 그런 점에서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향한 관객들의 기대가 높아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왕과 사는 남자’는 1457년 청령포를 배경으로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과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된 어린 선왕의 이야기를 그린다. 한국 영화 최초로 단종을 스크린의 중심에 담아낸 작품으로 장항준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며 유해진, 박지훈, 유지태, 전미도 등이 출연한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만난 유해진은 “모처럼 전 세대가 함께 볼 수 있는 작품이 될 거라는 기대가 크다”며 “특정 타깃을 겨냥한 영화가 많은 요즘, 배우로서 쉽게 만나기 힘든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애착이 크다”고 개봉 소감을 전했다.

“언론 시사회에서 영화를 처음 봤는데 저도 울고, 지훈이도 울고, 다 울었어요. 다 아는 이야기인데도 주책맞게 눈물이 나더군요.(웃음) 단종의 알려진 서사뿐 아니라 유배지에서 마지막까지의 여정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느꼈어요. 가벼운 슬픔이 아니라 여운이 오래 남는 작품입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제 안에 남아 있을 작업이에요.”

‘라이터를 켜라’ ‘기억의 밤’ ‘리바운드’ 등을 선보인 장항준 감독의 첫 사극 연출작이라는 점에서도 이목이 집중된다. 장 감독은 단종의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단종과 함께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낸다.

“장항준 감독은 보이는 그대로 굉장히 유연한 분이에요. 그게 가장 큰 장점이죠. 마음이 열려 있고, 어떤 제안도 현명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센스가 있어요. 배우와 교류하며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걸 즐기는데, 그런 면에서 정말 잘 맞았습니다. 디테일한 아이디어를 제안하면 ‘이틀만 달라’고 하신 뒤 실제로 수정된 안을 들고 오시더라고요.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박지훈 에너지에 깜짝 놀라… 아역 출신 내공 느껴져”

유해진은 극중 단종이 유배 온 광천골의 촌장 엄흥도를 연기한다.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인물로 유쾌함과 인간적인 면모를 동시에 지닌 캐릭터다. 엄흥도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평생을 숨어 살았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전부다. 장항준 감독과 유해진은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상상력을 더해 영화 속 엄흥도를 완성했다.

“연기하면서 엄흥도의 마음을 점점 이해하게 됐어요. 특히 마지막에 단종이 자신의 목숨을 끊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서 엄흥도의 입장이 100% 공감됐죠. 이 또한 전해지는 설 중에 하나고 영화적인 설정이긴 하지만, 단종과 엄흥도의 관계와 정서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느꼈어요.”

이 작품은 유해진의 관록이 빛나는 동시에 박지훈의 에너지가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박지훈은 단종 이홍위 역을 맡았다. 장항준 감독은 “‘약한영웅 Class’에서 보여준 폭발적인 연기를 보고 놀랐다. 단종 이홍위는 박지훈이어야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사실 ‘약한영웅’도 못 본 상태였고 촬영 전에 조금 통통한 친구가 와서 살짝 걱정했어요.(웃음) 그런데 촬영 시작할 때는 반쪽이 돼서 나타나더라고요. 현장에서도 거의 먹지를 못하는데, 고생하는 게 보여서 안쓰러웠어요. 초반에 지훈이와 연기를 맞춰보는데 에너지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역 출신다운 내공이 느껴졌어요. 무엇보다 극 중 홍위 캐릭터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가볍지 않고, 묵직하면서도 진솔한 친구예요.”

배우 유해진과 박지훈이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만났다. 쇼박스 제공

배우 유해진과 박지훈이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만났다. 쇼박스 제공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의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올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다. 강원도 영월에서 배우와 스태프가 동고동락하며 작품을 완성했다.

“외부 방해 없이 촬영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어요. 분장 버스에서 촬영장까지 거리가 있어서 약 2km를 걸어야 했는데, 그 시간 동안 지훈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많이 가까워졌어요. 그렇게 쌓인 관계가 자연스럽게 단종과 엄흥도의 관계로 이어진 것 같아요.”

대중이 사랑하는 배우, 유해진

상상력을 가미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역사 영화와는 다른 길을 간다. 유해진이 연기한 엄흥도 또한 실존 인물이지만, 영화적으로 재해석해낸 인물이다. 하지만 허구의 이야기가 섞여 있다고 해도 역사이자 실존했던 인물이기에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했다.

“엄씨 성을 가진 지인이 있는데, 엄흥도는 가문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인물을 연기하는 데 있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어요. 혹시라도 누가 되지는 않을지, 자칫 희화화되지 않을지 계속 고민하며 연기했습니다.”

유해진은 20년 전 영화 ‘왕의 남자’로 관객과 만났다. 2005년 개봉한 이 작품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신드롬을 일으켰고, 유해진은 광대패의 일원 육갑 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신스틸러에서 주연으로 20년 만에 다시 왕의 이야기를 만난 셈이다.

“이준익 감독님과 정진영 선배님이 시사회에 와주셨어요. 차곡차곡 쌓아가는 연기가 너무 좋았다고 말씀해주셔서 더 뜻깊었습니다. ‘왕의 남자’가 있었기에 ‘왕과 사는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시사회 이후 호평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유해진의 연기에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단종을 끝까지 보필한 궁녀 매화 역의 전미도는 “클라이맥스 신을 앞두고 홀로 몰입하고 계신 유해진 선배님의 옆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한 장면을 위해 온전히 집중하고 계셨다”고 전했다.

“특별한 계산 없이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하지만 제 연기가 특별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야기가 달라서 연기가 달라 보일 뿐 저는 늘 같습니다.(웃음) 이야기에 잘 녹아드는 연기를 하려 노력할 뿐이죠. 마음에 걸리는 장면이 있으면 상황을 계속 되뇌며 대본을 붙잡습니다. 무식한 방법일지 몰라도, 저에게는 그 방법밖에 없어요. 대본을 놓지 않다 보면 결국 답이 나오더라고요. 그게 제 연기의 비결이라면 비결이죠.”

한편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오는 2월 4일 개봉한다.

김연주 기자 yeonju.kim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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