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개방 약속하고도 버젓이 선박 공격하는 이란, 왜?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트럼프, 유가 떨어뜨리려 졸속 합의
“해협 통제권 인정” 주장 빌미 제공
명분 밀린 美, ‘해안 원점 타격’ 주력

미군 중부사령부의 대이란 타격 작전 도중 발사체가 발사되고 있다. 12일 공개된 영상에서 캡처된 이미지다. 로이터 연합뉴스

미국이 지난달 중순 이란과 종전 양해각서(MOU)에 합의한 것은 2월 말 개전 뒤 석 달 넘게 이란이 봉쇄해 온 호르무즈해협을 다시 개방하기 위해서였다. 전 세계 원유 및 액화천연가스(LNG)의 약 20%가 통과하던 해협이 막히면서 국제 유가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해협 재개방을 위해 이란 항구의 봉쇄를 해제하고 오랫동안 미국이 제재로 막아 온 달러화 원유 판매까지 이란에 허용하며 양보했다.

하지만 막상 해협 통행량이 회복 조짐을 보이자 이란이 몽니를 부리기 시작했다. MOU에 두 나라 대통령이 서명한 지 열흘도 안 돼 버젓이 상선을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이 합의를 어겼다는 게 이유다. 이란처럼 호르무즈해협 내 영해를 보유한 오만이 유엔 산하 국제해사기구(IMO)와 협의해 설정한 항로로 해협 통과 선박을 유도한 게 미국이 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 이란은 자국이 지정한 항로로만 선박들이 다녀야 한다고 트집을 잡았다. 전쟁 중 이란은 안전 통항을 보장받으려면 선박 한 척당 200만 달러(약 30억 원)를 내라고 해운사들에 요구했다. 항로 제한은 통행료나 수수료 징수의 포석일 터였다.

새 지도부의 모험주의

이란은 MOU 5항을 근거로 미국이 자국의 배타적 해협 통제권을 인정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호르무즈해협 재개방 약속이 담긴 MOU 5항을 보면 “상선들의 안전 통항을 위해 이란이 최선을 다해 조치를 취할 것(will make arrangements)”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란이 오만과의 대화를 통해 호르무즈해협의 미래 관리 및 해상 서비스 방식을 정할 것”이라는 문구도 등장한다. 미국은 MOU 5항이 호르무즈해협의 안전한 항행을 이란이 보장하라는 의미라고 했지만, 해석의 차이가 큰 것이다.

결국 MOU를 둘러싼 미국의 졸속 합의가 부른 참사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서두르다가 문구의 위험성을 면밀히 따지지 못하고 이란에 아전인수 해석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조 바이든 전임 미 행정부에서 주사우디아라비아 미국대사를 지낸 마이클 래트니는 “이란이 자국에 해협 통항을 통제하는 역할이 부여됐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라고 미 뉴욕타임스(NYT)에 말했다. 공화·민주 양당 행정부에서 모두 미국의 중동 협상가로 일한 데니스 로스는 NYT에 “이란이 완전한 통제권을 갖고 (자국 지정 항로 외) 다른 항로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해협 개방이 가능하다는 게 이란의 분명한 입장”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미국과의 전쟁 뒤에 들어선 새 이란 정권의 성향도 작용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중동 담당 국장 사남 바킬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 위험을 꺼리는 성향인 만큼 자국이 ‘뉴노멀’(새 기준)인 저강도 분쟁을 감내한다면 미국을 지치게 만들어 양보를 받아 낼 수 있다고 계산하며 이란이 도박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이란 새 지도부의 모험주의가 강해졌다고 진단하며 “현재 이란은 검증되지 않은 세력이 이끄는 새로운 이란”이라고 강조했다.

“아동 살해 미군” 여론전

9일 이란 북동부 마슈하드의 이맘 레자 성지에서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전 이란 최고지도자 장례식의 마지막 절차인 안장식이 거행되기에 앞서 조문객들이 구호를 외치며 주먹을 들어 올리고 있다. 이란 최고지도자실이 공개한 사진이다. AP 연합뉴스

미국은 이란의 해협 통제 역량 약화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이란이 상선을 공격할 때마다 원점 군사 시설을 타격하는 방식이다. 미군 중부사령부가 1주일 새 이란을 공습한 횟수는 다섯 차례에 이른다. 7, 8일 연이틀 이란 남부 해협 주변의 미사일과 무인기(드론) 저장소 및 발사대 등을 폭격한 미군은, 11일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가 상선 공격도 모자라 해협 재봉쇄까지 선언하자 횟수를 늘려 당일과 12일 이틀간 세 차례나 이란 남부를 공격했다.

이란도 공격 원점인 걸프(페르시아만) 연안 주변국 미군 기지를 폭격하는 식으로 똑같이 보복했다. 더불어 여론전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란 외무부는 이날 미군의 공습 개시 발표 직후 낸 성명에서 미군의 “야만적인 공격은 유엔 헌장의 기본 원칙을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라고 규탄했다. IRGC도 성명에서 “‘아동 살해범 미국 군대’가 또다시 이란 해안 기지들을 침략함으로써 야만적인 본성을 드러냈다”며 요르단 및 바레인 미군 기지 시설 파괴 성과를 소개한 뒤 “전사들의 보복 작전은 계속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군을 아동 살해범으로 부른 것은 개전 첫날 이란 미나브 지역 초등학교가 미군의 공습을 당해 이 학교 어린이·교사 175명이 숨진 사건을 상기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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