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기부왕’이었는데…엡스타인 문건에 이미지 ‘나락’ 간 빌 게이츠

반독점법 소송 계기 증언으로
‘범생이 폭군’ 꼬리표 붙어
재단 활동과 패션 점검으로 ‘소탈한 자산가’로
엡스타인 문건에 이미지 바닥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2022년 9월 뉴욕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욕=AP 연합뉴스

‘범생이 폭군(Nerd Bully)’ ‘실리콘밸리의 악마’ 꼬리표를 떼기 위해 수년간 이미지 관리에 투자했다. 자신과 똑같은 크기의 마네킹에 다양한 스타일의 옷도 입혀 보며 대외적으로 비칠 모습에도 신경 썼다. ‘기부왕’이란 별명도 얻었다. 그런데 한 묶음의 문건 앞에서 모든 게 무너졌다. 한때 세계 제일의 부자로 이름을 날렸던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창립자의 얘기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31일(현지시간) 미성년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과의 인연으로 게이츠가 수년간 공들인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졌다고 보도했다. 게이츠는 1998년 반독점 소송 당시 녹화된 증언에서 오만해 보이는 태도로 일관해 ‘독점 포식자’ ‘범생이 폭군’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이후 게이츠는 자신과 전처 이름으로 설립한 빌앤드멀린다게이츠재단의 홍보 인력을 적극 동원해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집중했다.

게이츠의 개인 사무실인 게이츠벤처스에선 맞춤형 마네킹에 직접 옷을 입히기까지 하며 게이츠의 이미지를 점검하기까지 했다. 대외 행사가 잡히면, 의상 후보 3가지를 추려내 임원들의 승인을 받았다. 그렇게 브이넥(V-neck) 스웨터와 특정 브랜드의 안경, 정장 바지보다는 조금 헐렁한 슬랙스가 게이츠의 단골 패션으로 자리 잡았다. 게이츠는 2019년 유고브 여론조사에서 달라이 라마와 교황 프란치스코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엡스타인 문건이 폭로되면서 모든 게 무위로 돌아갔다. 앞서 WSJ는 2023년 5월 엡스타인이 게이츠가 러시아 여성과 불륜 관계였다는 사실을 이용해 협박하려 했다고 보도했다. 미 하원 감독위원회가 지난해 12월 공개한 문건에서 게이츠가 신원 미상의 여성들과 찍은 사진이 나왔고, “엡스타인의 비서들”이라는 해명을 납득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미 법무부가 1월 공개한 문건에서는 엡스타인이 게이츠의 불륜 상대였던 러시아 여성을 후원한 정황도 포착됐다. 논란이 커지자 게이츠는 올 2월 재단 내 비공개 회의에서 러시아 여성 두 명과의 불륜 사실을 인정했다고 WSJ는 보도했다.

후폭풍은 거셌다. 게이츠는 수년 만에 처음으로 올해 5월 MS 연례 최고경영자(CEO) 회의에 맞춰 자택에서 열려고 했던 만찬 행사를 취소해야 했다. MS 측에서 “올해는 열지 않는 게 좋겠다”는 취지의 입장을 게이츠에게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인도 정부도 2월 뉴델리 인공지능(AI) 정상회의에서 예정됐던 게이츠의 기조연설을 취소했다.

게이츠의 이미지가 추락하면서 빌앤드멀린다게이츠재단 사업에도 악재가 됐다. 재단의 오랜 후원자였던 워런 버핏은 3월 미국 CNBC와 방송인터뷰에서 “추가 내용을 지켜본 뒤 연례 기부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마크 수즈먼 재단 CEO는 2월 직원 회의에서 게이츠와 엡스타인의 관계로 “재단 이미지도 다소 더럽혀진 느낌”이라고 토로했다. 게이츠는 이달 10일 미 하원 감독위원회에 자발적으로 출석해 엡스타인과의 관계를 해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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