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지어야 이긴다… SK 상장에 뜨거워진 5개국 반도체 ‘패권 전쟁’
김진욱 기자
투자 경쟁에 기름 부은 하닉 美 상장
해외 투자 예고로 참전 의지 밝힌 SK
하닉 의식한 마이크론, 새 투자 발표
나란히 증설 가속도 TSMC, CXMT
라피더스, 사실상 ‘가격 경쟁’ 선포도

마이크론이 미국 뉴욕주 클레이타운에 짓는 반도체 공장 조감도. 마이크론 제공
인공지능(AI) 시대 ‘전략물자’로 떠오른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패권 전쟁이 새롭게 불붙었다. 선두 기업 SK하이닉스가 미국 나스닥 상장 흥행에 성공하며 40조 원의 ‘실탄’을 확보하자 ‘전쟁터’엔 긴장감이 치솟고 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시장을 뒤흔들던 ‘반도체 고점론’도 각국이 돈과 속도를 무기로 투자와 증설을 경쟁적으로 발표하면서 더 힘을 받지 못하는 형국이다.
12일 테크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마이크론,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TSMC, 라피더스 같은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 경쟁에 들어갔다. 업계 한편에선 올해 예정된 투자 규모만 총 200조 원에 이를 거란 전망도 나온다.
“경쟁자들 질투심 느껴 따라올 수밖에”
경쟁에 기름을 부은 건 SK다. 삼성전자와 함께 서남권 생산시설(팹) 신설을 공식화한 지 열흘여 만에 SK하이닉스를 나스닥에 상장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10일(현지시간) 미국 CNBC에 출연해 “메모리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며 “미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지역을 (새 팹 입지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추가 투자를 예고하며 일각의 반도체 ‘피크아웃’ 가능성에 선을 긋고 패권 경쟁에 참전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SK의 행보를 의식한 듯 마이크론은 SK하이닉스 나스닥 상장 하루 전인 9일, 2035년까지 미국 내에 2,500억 달러(약 376조 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뉴욕주 클레이타운에서 열린 마이크론의 팹 콘크리트 타설 기념식에는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까지 직접 참석해 “마이크론이 앞장서고 있으니 경쟁자들은 질투심을 느낄 것이고 결국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도발적 발언으로 새 패권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마이크론은 올해 설비투자에 전년 대비 120% 급증한 17조 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일본 히로시마에도 14조 원을 투입해 차세대 HBM 팹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중국 반도체 굴기의 선봉에 선 CXMT는 이달 중 상하이 증시에 295억 위안(6조5,195억 원) 규모의 기업공개(IPO)로 자금 마련에 나선다. 이렇게 확보한 돈은 허페이와 베이징에 있는 웨이퍼 생산라인 확장에 투입될 예정인데, 업계에선 자금 대부분이 범용 D램 생산라인 고도화에 쓰일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픽=이지원 기자
판 커진 이유… ‘반도체는 국가 안보’ 인식
TSMC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대만 본토 생산라인 증설 외에 미국 내 투자 규모를 최대 362조 원까지 확대할 가능성이 최근 제기됐다. 이미 애리조나주에 웨이퍼 공장과 패키징 공장, 연구개발 센터를 짓고 있는데, 대만 언론에 따르면 세부 장비나 소재 같은 공급망 기업들까지 함께 미국 진출을 확대하고 있다.
9일 고이케 아쓰요시 라피더스 사장은 2나노미터(nm)급 첨단 반도체 가격을 TSMC보다 높게 책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상 ‘가격 전쟁’ 선포다. 2027년까지 2나노 공정 양산에 성공해 반도체 산업을 부활시키겠다는 라피더스의 목표에 일본 경제산업성은 5조8,477억 원을 추가 지원하기로 했으며, 누적 지원액은 21조7,61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는 경기 용인시 국가산업단지에 추진 중인 팹 6기 중 1호기 완공 시점을 당초 목표보다 1~2년 앞당겨 2029년으로 다시 잡았다. 업계에서는 반도체 공장 건설이 통상 2년가량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내년에는 본격적인 건설이 이뤄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말 정부의 메가프로젝트에 따라 평택·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1,650조 원, 호남권에 400조 원을 투자할 계획을 발표했다.
세계 반도체 시장의 투자 전쟁은 빅테크들의 행보와 맞물려 있다. 구글과 아마존,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하이퍼스케일러(대형 기술기업)들이 데이터센터 같은 AI 인프라를 늘리고 자체 AI 모델을 고도화하는 과정에서 반도체 수요가 급증한 것이다. 그에 따른 공급 부족이 국가 안보 문제로 강하게 인식돼 수출 통제 같은 갈등 요소까지 더해지면서 각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경쟁의 판이 점점 커졌다.
SK “메모리 외 수백억 달러 투자 찾는다”

최태원(앞줄 왼쪽 네 번째) SK 회장과 곽노정(세 번째) SK하이닉스 대표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1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나스닥 마켓사이트에서 열린 SK하이닉스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상장 기념 ‘오프닝 벨’ 행사에 참석해 벨을 누르고 있다. SK하이닉스 유튜브 캡처
이런 상황에서 SK하이닉스 상장으로 대규모 자금을 확보하게 된 최 회장은 공세적 전략을 숨기지 않았다. 상장 직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에 최대한 투자를 많이 해도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다”며 “전력과 물, 땅에 맞는 장소가 있다면 미국이든 세계 어디든 상관없다”고 강조했다. SK는 메가프로젝트로 용인·청주·서남권 반도체 생산기지에 1,100조 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SK의 투자 계획은 메모리 제조업에서 메모리 서비스업으로 영역을 확장하겠다는 구상을 깔고 있다. 최 회장이 CNBC에 “AI 데이터센터, AI 기술, AI 스타트업 분야에서 (메모리보다) 훨씬 큰 투자를 찾고 있다”며 예상 투자 규모를 “수백억 달러”라고 소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업계는 받아들이고 있다. 투자 범위는 인프라를 넘어 로보틱스, 헬스케어 등 피지컬 AI 분야로도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 SK는 이미 미국에 AI 관련 해외 투자를 맡는 전담 기업 ‘AI 컴퍼니’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 김진욱 기자kimjinuk@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