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33도’ 선풍기도 못 켠다… 폭염이 가장 먼저 덮친 ‘취약계층’
낮 35도·밤 30도에 취약계층 시름
에어컨 고사 선풍기·위생시설 소외
서울역 광장 그늘 찾아 나온 노숙인
공장·배달 기사 생업에 폭염과 사투

13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 희망촌 주민들이 천막을 덧댄 처마 밑에 모여 앉아 냉커피를 마시며 무더위를 피하고 있다. 나민서 기자
“평소 오가던 동네 사람이나 어르신이 아침에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일 생긴 건 아닌지 가슴이 철렁해요.”
하루 일과가 시작된 13일 오전 9시 서울 기온은 벌써 30도를 가리켰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 희망촌 주민들은 천막 아래 그늘에 모여 간밤의 안부를 물었다. 무더위를 피할 경로당이나 쉼터가 없는 이 마을에선 아침 냉커피 한 잔을 나누는 것이 곧 생존 신고나 다름없다.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연신 냉커피를 들이켜던 윤이경(73)씨는 “어젯밤은 가마솥에 있는 것처럼 정말 뜨거웠다”며 “자고 일어나니 머리맡이 땀으로 흥건했다”고 말했다. 또 “천막으로 햇볕을 가려놨어도 피부가 새카맣게 탔다”며 “이번 여름은 유독 무섭다”고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전기요금 부담에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조차 종일 틀지 못한다. 텃밭 일을 서둘러 마친 이금순(87)씨는 세탁기 옆 대야에 받아둔 물로 겨우 얼굴을 적셨다. 집 안에선 텁텁하고 눅눅한 열기가 훅 뿜어져 나왔다. 이금순씨는 “노인들이 갈 곳도 마땅치 않고 땀이 나도 전기요금이 걱정돼 하루 한 번 샤워로 버틴다”고 했다.

13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 희망촌에 사는 이금순씨가 텃밭 일을 마친 뒤 대야의 물로 더위로 식히고 있다. 나민서 기자
2018년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이 폭염 속 옥탑방에서 ‘한달살이’를 했던 강북구 삼양동 인근 청암경로당은 더위를 피하기 위한 어르신들로 붐볐다. 집에선 냉방기기를 마음껏 틀기 어려워 점심시간마다 경로당을 찾는다는 이완식(83)씨와 박성남(77)씨 부부는 “에어컨 바람을 쐬면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면서 땀을 식혔다.
또 다른 주민 유봉현(82)씨는 “나이가 있으니 언덕길을 오르내리기 어려워 경로당에 오는 것도 쉽지 않은데 주말에는 경로당이 문을 닫아 더욱 막막하다”며 “동네 카페라도 가면 사장이 눈치를 줘 매우 난처하다”고 토로했다.

13일 무더위를 피해 서울역 지하보도에 노숙인들이 자리를 펴고 누워 있다. 이재명 기자
이날 낮 기온이 33도까지 치솟자 서울역 주변 노숙인들은 야외 그늘로 모여들었다. 빈 지하보도에 거처를 만들어 놨지만 바람이 통하지 않다 보니 퀴퀴하고 축축해 견디기가 더 힘들다. 10년째 서울역에서 사는 이모(66)씨는 “이렇게 날이 더울 때는 무더위 쉼터를 찾아가는 것도 귀찮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게 차라리 낫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지하도 계단에 삼삼오오 모여 막걸리, 소주를 마시는 노숙인도 있었다. 소매를 겨드랑이까지 걷어 올린 김모씨는 “다 벗으면 뭐라 하니까 못하고, 경찰이 쳐다보면 소매를 슬쩍 내리면 된다”며 웃어 보였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다시서기종합센터는 노숙인들에게 하루 서너 번씩 얼음물을 나눠주고 있다. 센터 관계자는 “폭염에 무더워 쉼터 이용자가 하루 200명까지 급증했으나, 음주자는 입장을 제한하고 있어 여전히 밖에 있는 사람도 많다”고 설명했다.

13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기계금속단지 한 공업사에서 한 직원이 무더위 속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고 용접 작업을 하고 있다. 공병선 기자
생업을 내려놓을 수 없어 무더위와 사투를 벌이는 이들도 있다. 영등포구 문래동 기계금속단지에선 오전 8시부터 고열을 내는 기계들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용접 업체를 운영하는 양창대(54)씨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쉼 없이 용접 불꽃을 튕기고 있었다. 양씨는 “사우나 안에서 용접 헬멧을 쓰고 작업하는 기분”이라며 “에어컨은 있지만 작업할 때는 쇳가루나 먼지가 날리는 게 더 건강에 안 좋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했다.
펄펄 끓는 도로를 누비는 배달 라이더들은 속도전을 펼치는 중이다. 조금만 배달이 늦으면 음식이 쉬 상하는 탓에 땀을 식힐 짬도 없다.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에서 만난 라이더 김모(34)씨는 쿨링팬이 달린 조끼를 입고도 온몸이 땀에 젖었다. 그는 “먼 거리에서 초밥, 김밥 주문이 들어오면 안 받기도 한다”며 “날씨가 더워도 배달 수요가 늘어나니 꾹 참고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한다”고 말했다.
배달 주문을 확인하던 최재경(31)씨도 오토바이 앞에 얼음이 다 녹은 커피 컵을 가리키며 “먹으려고 둔 게 아니라 너무 더울 때 팔토시에 시원하게 뿌리려고 둔 것”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13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 근처에서 배달 라이더 최재경(31)씨가 무더위 속에서 배달 주문을 확인하고 있다. 남병진 기자
- 이재명 기자nowl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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